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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끄적임

자격증과 자격시험에 관한 생각

by LarchmontKorean 2022.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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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회계법인에서 일하다 보면 회계사와 변호사들 간의 신경전을 가끔 볼 수 있게 된다. 누구의 시험이 더 어려웠는지 누가 더 많이 배우고 누가 더 많이 알고 있는지, 또 누가 사회적으로 위상이 더 높은지 가려내기 위해 알게 모르게 신경전을 벌인다. 사무실을 벗어나도 이 논쟁은 인터넷 포럼에서 계속된다.

 

Which exam is more diffcult, the CPA exam or the Bar? 구글에 많이 물어보는 자격시험에 관한 질문 중 하나다. 이 질문의 골자는 결국 누가 더 똑똑해야 할 수 있는 직업인가를 물어보는 거다. 일단 내 생각을 말하자면 변호사가 되는 시험이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LSAT을 치르고 로스쿨에 입학한 후 4년의 공부 과정을 거쳐 패스해야 되는 변호사시험과 달리 CPA 시험은 진입장벽이 상대적으로 낮고 공부량도 적은 편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변호사가 일반적으로 회계사보다 똑똑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또 변호사든 회계사든 전문직 종사자들이 자격시험을 보고 합격해 단순히 면허를 얻는 일 자체만으로 수년간의 경력과 증명된 업무성과 없이 그 사람에 관해 무엇을 더 말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며칠 전 이런 답글을 보게 되었다. AICPA 시험을 누구나 합격할 수 있는 시험처럼 쓴 글이 최근 자신이 힘들게 합격해 이뤄낸 CPA라는 직업을 폄하하는 듯하여 굉장히 기분이 나쁘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답글을 읽고 바로 독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뭔가 머리에서 반짝하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나도 CPA 시험을 패스하고 자격증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건 사실이다. 또 내 자신이 CPA이기 때문에 굳이 폄하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도 분명하고 변별력을 위해 갈수록 시험이 어려워지는 것도 사실임을 인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독자 분 또는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 내가 하나 깨달은 점을 공유하고 싶다.

 

자격지심과 열등감이 많던 대학생 시절, 난 누군가가 좋은 회사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부럽기도 했고 배가 아프기도 했다. 몇 년 뒤 나도 취직을 했고 나를 부러워하던 후배들을 내려다보며 우쭐해했던 기억이 있다. 우쭐함을 느끼던 것도 잠시, 어느덧 나도 입사를 하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일하다 만난 높은 직급의 상사들을 보면 마냥 쩔쩔매며 그들을 신격화하기도 했고 가끔 동기들끼리 모여 수다를 떨면 '누구누구는 아직도 CPA 시험을 패스 못했데' 하며 남을 흉보기도 하고 함부로 안쓰럽다는 시선을 보내기도 하며 집단적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몇 달 안되어 직장생활을 해보니 남의 돈을 벌어오는 것이 참 쉽지 않음을 나도 깨닫게 되었다. 밤새도록 일해도 어려운 일은 끝나지 않았고 승진을 하기 위해선 영혼까지 바쳐야 될 것처럼 고되고 힘들었다. 그제야 퇴근 후 밤하늘을 벗 삼아 담배를 서너 개 피우시던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에서 느껴지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월이 더 흐르고 나이도 한두해 더 먹어가며 쓴 맛도 보고 삶의 불가항력인 일들을 경험해 가며 느낀 사실이 있었다. 하늘 아래 그 누구도 우월하지 않고 우리 모두 그저 피와 살로 만들어진 인간에 불과하단 사실이었다.

 

최근 병원에 자주 가야 될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일이 잘 해결되길 바라는 간절함 뒤에 힘든 수술을 하는 의사들을 만나며 든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다. 의사들은 수년의 어려운 공부와 자격시험으로 면허를 부여받기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이다. 병원을 다니며 관찰을 해보니 이렇게 항상 우러러보던 의사들의 상당수가 사실 거만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느끼고 참 새로웠다. 매일 인간의 가장 나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봐야 되는 그들은 이미 한참 전에 무언가 깊이 깨달은 바가 있는 듯싶었다.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질병과 세월 앞에 꼼짝없이 쓰러져 죽거나 불구가 되는 사람들을 보며 그 외면의 화려한 치장과 격식이 마치 바람이 불면 힘없이 무너지는 종이카드로 쌓은 성과 같이 허무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은 듯 보였기 때문이다.

 

현실을 마주하자면 직업적 성공과 경제적 여유로움이 필요한 것은 당연함을 깨닫게 된다. 당장 내야 하는 공과금과 매달 발생하는 고정지출을 보며 난 언제 돈을 크게 벌어 잘 살 수 있게 되려나 마음이 급해지기도 한다. 나보다 잘 사는 친구나 이웃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나보다 못 사는 사람을 보면 답답하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처럼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자만해진다면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나타났을 때 한 없이 초라해지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극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의 엘리트 계층들의 자산증식을 위해 존재하는 회사를 직장 삼아 다니다 보니 내 연봉의 10배 혹은 100배를 받는 사람들을 사무실에서도 심심찮게 마주하게 된다. 어릴 적의 나 같았더라면 그들의 연봉을 보고 자본주의의 폐단이라고 화를 냈을 거다. 그러나 지금은 초연하다. 그들도 나와 같이 어쩔 때는 걱정과 근심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또 어쩔 때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세상모르게 즐거워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병마와 싸우며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돈과 명예 혹은 내가 가진 자격증 따위의 이 작은 한 장의 종잇장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생각해본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힘들게 노력하여 이룬 업적이 아무 쓸모가 없단 것은 아니다. 한번 사는 인생 속에 무엇이든 고생하여 이루어낸 것이 있다면 당연히 자축해야 될 일이긴 하다. 다만 모두가 언젠간 죽어야 된다는 공동의 운명을 공유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비극적이지만 또 어찌 보면 욕심과 망상을 떨쳐내고 삶의 외형적인 것을 벗어나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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