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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생활 이야기

이민생활의 가장 슬픈 점 - 외로움과 박탈감

by LarchmontKorean 2021.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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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생활의 단점 - 외로움과 심리적 박탈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민의 장점에 대해서 말한다. 내 가족과 조상이 세월을 거치며 몸과 마음을 바쳤던 국가와 민족을 떠나는 만큼 그 이유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은 장점을 강조하며 자기 합리화를 하고 그걸 위안으로 삼으며 살아간다. 실상은 정작 가진건 아무것도 없지만 미국에 산다 또는 영어 몇 마디 할 줄 안다는 걸 훈장같이 여기고 한인타운에 있는 조촐한 아파트에 들어가 그날 저녁도 라면으로 때우고 한국 뉴스와 드라마를 보며 살아간다.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갈 능력도 없고 미국에서 성공하며 살아갈 자신도 없는 게 현실이다.

 

어쩌다 한국 뉴스를 보니 박근혜 전 대통령이 나왔다. 철창에 갇혀 있는 신세지만 영어사전과 독일어 사전 그리고 몇 권의 책들로 무장을 하고 그것들을 주렁주렁 이고 다니면서 스스로 위안을 얻을 그 외로운 마음을 상상하니 이런 이민자들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다. 차라리 독방에 갇힌 사람은 외롭지 않을 거 같다.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휘황찬란한 세상에 저마다 SNS에 행복한 추억과 사진을 공유하는 걸 보며 방 안에 갇혀있는 현실의 나를 비교하게 되는 순간 철저하고 처절한 외로움이 밀려온다. 비 온 뒤 인기척이 사라지면 그제야 고개를 내밀고 드넓은 운동장을 홀로 엉금엉금 한 발짝씩 가로질러가는 달팽이만큼 이민자들은 숨죽이고 살며 오늘 하루도 버티기 위해 존재한다. 이민은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의 반복이고 난 가끔 수년 전 한국을 떠날 때 한국땅에서의 마지막 노을을 바라보며 무한한 영광과 성공을 꿈꿨던 나의 어리석고 작았던 모습을 되돌려보며 쓴웃음을 짓기도 한다.

 

아직도 인터넷에는 유학을 가고 싶다 해외에 나가 살고 싶다는 글들이 올라온다. 블로그와 유튜브 영상은 이민과 유학생활의 단편적인 모습만 보여줄 뿐이기에 실상을 알 길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외로움과 박탈감의 그림자를 오늘 말하고자 한다.

 

언어적 박탈감

언어를 잃어버린 기분은 말 못 하는 바보가 된 기분이다. 사람들이 날 바보로 여기고 하도 자주 이런 일이 있다 보니 실제로 나도 정녕 바보가 돼버린 게 아닌가 하는 착각도 들었다. 어느새 나의 조용함에 익숙해져 버린 세상은 나를 과묵하다고만 평가하고 아주 가끔씩 친한 친구에게만 보여주는 나의 활달함을 발견하는 순간 나도 나의 이런 이중적인 모습에 스스로 놀라곤 했다. 난 분명히 생각이 있고 어떤 이슈에 대해 논리 정연하게 내가 태어난 국가의 지리적 테두리 안에서 쓰이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럴 방법이 없고 보여서 증명할 수도 없으니 일단 남들의 눈에는 바보가 되고 마는 거다. 하고 싶은 말도 몰라서 못하고, 할 수 있는 말만 골라서 했었다. 그러다 보니 말을 해도 사람들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영어 공부를 할 목적으로 귀가 터져라 들었던 드라마나 광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짧은 표현만 기계적으로 반복하다 보니 나의 의견은 항상 대중의 의견 또는 그저 그런 단순한 의견만 가진 재미없는 사람밖에 안됐던 거다. 실상은 할 말이 많은데 말이다.

 

몇 년 전 회사를 같이 다녔던 한 일본 친구의 집에 놀러 가서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고 꿀 먹은 병아리처럼 내내 미소만 지으며 구석에 앉아 있던 어떤 일본인을 만난 적이 있다. 남들은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 있길래 원래 말도 없고 수줍고 마냥 착한 사람인 줄 알았다. 곧이어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집에 초대가 되어 들어왔고 그들을 보자마자 얼굴이 환하게 펴지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로 쉴 새 없이 떠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목소리와 웃음소릴 처음 듣고 나 자신의 옛날 모습이 생각나 가엽게 느껴졌다. 가끔은 입을 닫고 내 언어를 포기하다 보니 생각마저 자연스럽게 없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가상의 전체주의 국가에서 언어를 단순화시켜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혼란을 잠재운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소설 속의 일이 나에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듯했다. 훗날 대학에 가서 토론을 해보니 내 또래의 아이들이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표현과 다채롭고 색깔 있는 의견들이 얼마나 많던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말이 주옥같이 느껴져 공책에 한 글자 한 글자 주워 담아 공부했던 적이 있다. 

 

서점에서 우연히 초록 칠판에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Me talk pretty one day'라고 쓴 커버의 책을 본 적이 있었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이 책을 사고 집에 와서 읽었다. 한 미국인 작가가 프랑스에서 살며 겪었던 경험담과 언어의 장벽을 에세이 형식으로 쓴 책이었다. 불어를 하지 못해 누가 물어보면 미소로만 대답을 하던 작가에게 "Village idiot" (동네 바보)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그런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열심히 불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언젠가 내도 말을 이쁘게 할거여!" (Me talk pretty one day!)라고 어눌한 불어로 소리치며 동화책을 읽으며 공부하고 학원까지 다녔던 작가에게 친숙함과 동질감을 느끼며 읽었던 좋은 책이다. 그처럼 나도 대학 수업 시간 때 봤던 그 미국인 학생들처럼 언젠가 저렇게 영어로 말을 잘하고야 말 거다라는 신념으로 살아왔다. 그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기죽지 않고 내 의견을 피력하리 생각하며 새벽까지 가상의 대화를 홀로 중얼대며 공부했던 적이 가끔 생각난다.

 

문화적, 인종적 박탈감

고등학생 때 일이다. 11학년에 들었던 AP English 클래스는 아직까지도 꿈에 나올 정도로 나에게 트라우마를 안겨 주었다. 문을 열고 교실 안에 들어가면 제일 처음 느껴지는 건 차가운 시선들이었다. 백인들로 꽉 찬 방 안에 나 혼자 한국 안경을 쓰고 한국식 헤어스타일에 한국식 옷차림을 하고 들어가 앉았다. 제일 앞에 앉았던 난 뒤통수가 마냥 따갑기만 했다. 저마다 손을 들고 아무 생각이나 쓸데없는 말을 하며 발표하지만 내가 어쩌다 손을 들면 살벌하게 조용해지는 분위기를 참 견딜 수 없었다. 선생도 의외라는 눈빛으로 인종의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함이라는 제스처를 하며 교과서적인 미소를 짓고 내 이름을 발음하지도 못해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발표를 허락했다. 정적이 흐르고 모두가 내 영어 발음 한 마디 한 마디, 한 숨 한 숨을 초정밀 마이크로 녹음을 하는 듯한 분위기에서 바짝 마른 입술을 떼어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돌리며 완벽하게 외웠던 어설픈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어쩌다 발음 실수를 하면 뒤에서 키득 거리는 소리가 났고 발표가 다 끝나면 선생의 반응도 참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애써 잘했다고 했다.

 

이런 영어수업이 끝나면 다른 교실로 이동했다. 수업을 옮겨 다녀야 되니 그 클래스의 아이들을 마주치기 싫어 먼 길을 돌아갔다. 언제나 내가 홀로 다니는 길이 있었다. 주위의 눈살을 피해 홀로 걸어 다니는 나만의 복도는 아무도 없는 복도 같지만 사실 나 같은 이민자의 아이들이 외롭게 서성이는 모습들이 가끔 보였다. 구석에 서서 점심을 먹거나 핸드폰 게임을 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나도 이들처럼 점심시간엔 외롭지만 혼자 밥을 먹었고 '오늘만 하필 혼밥을 하는 코스프레'를 하며 언제나 떳떳한 모습을 보이려고 행동을 조심했다. 나의 마지막 남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필살적인 방어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수다와 웃음소리로 시끄러운 카페테리아의 소음이 귀에 익어갈 때쯤이면 점심을 다 먹고 다음 수업으로 이동할 시간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끝나면 집으로 걸어왔다. 다음날 이 일이 반복될 때까지 잠깐이라도 마음 편히 내가 좋아하는 공부도 하고 영화도 보며 견뎌냈다. 가족들이 잠에 들기 시작하는 밤에는 언제나 불안하고 걱정이 앞섰다. 아 내일도 오늘처럼 그렇겠구나. 언제쯤 이 사이클을 벗어날 수 있을까.

 

소속감의 부재는 외로움을 가중시킨다

대학에 가니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전 세계에서 학생들이 오는 큰 대학에 다닌 만큼 나도 친구를 만들어 그룹에 낄 수 있겠다는 기대와 포부를 가지고 1학년을 시작했다. 운 좋게도 처음 만난 친구들은 중국인 이민 2세대들과 중산층 가정에서 곱게 자란 백인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영어를 못해도 그들의 부모를 보며 보고 자란 게 있기에 내 발음을 이해했고 잘 대해주었다. 처음에는 어딘가에 속한다는 소속감에 마냥 즐거웠다. 밥을 혼자 먹을 필요도 없었고 수업에 혼자 갈 경로를 미리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들의 틈에도 끼기 힘들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위 바나나라고 한다. 겉은 노랗지만 속은 하얀, 겉은 중국인이지만 속은 뼛속까지 미국인인 이들의 문화적 차이를 따라갈 재간이 없었다. 좋아하는 디즈니 캐릭터는 알라딘이랑 재스민 밖에 모르는 나한테 날이 새도록 디즈니 영화 얘기를 했고 인터넷을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 slang으로 범벅된 말을 했다. 엎친데 덮친 겪으로 가정에 경제적 위기까지 닥쳤다. 매월 수 천불이 들어가는 기숙사에서 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년을 마치고 난 기숙사를 나와 집에서 등교하기 시작했다. 한국과 달리 미국 대학생들은 대부분 기숙사나 학교 주변의 아파트에서 사는데 집에서 등교를 한다는 건 소셜 라이프에 사망선고를 하는 거나 다름이 없다. 그 이후로 갑자기 혼자가 되었다.

 

2학년 때 난 유학생들과 어울리려고 시도해봤다. 같은 한국말도 하고 한국 문화에 익숙하니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4년이라는 짧은 사이에 내 모습과 생각은 그들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에게는 그들만의 문화가 따로 있었다. 주로 웬만큼 사는 집 출신의 아이들이었던 유학생들은 씀씀이에서부터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내가 사회인이 되어 직장에서 자리를 잡고 나서야 몰 수 있는 차를 학생 시절부터 굴리고 있었고 거기서부터 느껴지는 집안 경제력의 차이가 나로 하여금 박탈감을 느끼게 했다. 지금도 벅찬 매월 2,000에서 3,000불이 되는 월세의 원룸을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었고 입는 옷과 외모에서부터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렇게 내 수준과 맞지 않는 유학생들과 어울리는 걸 포기했다.

 

그 후로 외롭지만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캠퍼스 곳곳에서 자라나는 풀과 향기로운 꽃을 보며 돌아다니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그렇게 잘 지내다가도 아름답고 밝은 세상을 둘러보자니 끝을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낀 적도 있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왜 난 슬픈 걸까. 이 드넓은 캠퍼스 안에서 나 홀로 클래스를 왔다 갔다 하며 걸어 다니는 그 기분은 낭만적으로 우울했다. 끝나면 곧장 집으로 오거나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를 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면 삼삼오오 모여 그룹 스타디를 하고 있고 어쩌다 또 고개를 들면 이미 하루의 절반이 지나가 해가 지고 있었다. 난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일부러 남들이 기피하는 그룹 프로젝트가 많은 클래스를 골랐었다. 이런 클래스에서 어쩌다가 한인 1.5세들을 만났다. 그들은 나 같은 사람들이었다. 아니 나와 똑같은 신세였다. 어쩌다 보니 미국에 와 있었고 어쩌다 보니 혼자가 되어 있었고 어쩌다 보니 삶의 재미는 뒷전이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수년간의 이민생활로 부모의 돈은 이미 바닥나 있었고 세탁소나 장사를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부모 밑에서 어렵게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었다. 이들도 나처럼 0개 국어였고 유학생과는 어울리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미국 애들하고도 못 어울리는 처지였다. 동병상련이라고 했다. 그렇게 나도 그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들과 어울리며 찾아간 하우스 파티에는 생각 이외로 곧곧에 숨어있던 1.5세들이 많았다. 한참을 서로 얘기하며 이민 1.5세대들의 고충에 대해 불평도 하고 울고 웃기도 했다. 한쪽에선 영어를 쓰고 다른 한쪽에선 한국말을 쓰고 말 중간중간에 영어를 섞어 써도 아무런 눈치를 주지 않았고 발음이 어눌해도 영어는 모두에게 제2 외국어였기 때문에 괜찮았다. 파티의 정점에는 어김없이 마약과 술과 담배가 나왔다. 그들 중 여기서 태어난 몇몇도 있었지만 그들에게도 소속적 박탈감은 영혼을 메마르게 하는 슬픔이었고 끼리끼리 어울리며 놀다가 외로움과 박탈감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우울함을 해소할 길은 자연스레 건전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미국으로 왔을 때 학교를 1년 반 늦게 시작했기에 만나는 친구들도 평균 2살 정도 어린 19살, 20살 어린 친구들이었지만 양주를 물 마시듯 했고 모이면 어딜 가나 담배를 피기 일수였다. 삶에 치어서 일까 담배를 많이 펴서 일까 이들은 또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편이었다. 내가 겪었던 것처럼 미국에선 이렇게 서로가 편할 수 있는 사람도 만나기 어렵단 걸 알고 일찌감치 결혼을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들과 어울리며 난 처음으로 내가 편하게 느낄 수 있는 소속감을 가졌고 사람은 소셜 라이프가 있어야 그나마 견딜 수 있단 걸 알게 되었다.

 

나를 잊어버린 한국, 내가 잊어버린 한국

성인이 되고 나서 가끔 한국에 들어가 본다. 미국으로 이민을 온 이후로 한국에 10년 만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내가 기억하던 한국과 너무나도 많이 달라져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에어비앤비나 작은 모텔에 숙소를 정하고 옛날에 살던 집에도 가보고 다니던 학교도 가봤다. 익숙한 풍경을 볼 때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지만 어디서도 집에 왔다는 느낌은 없었다. 이미 난 아직도 익숙지 않은 미국에 알게 모르게 익숙해져 버린 거다. 부모님도 사셨고 나도 태어나고 자란 한국에 돌아가도 집도 절도 없는 느낌을 받을 땐 난 어디에 속한 사람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내 민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어렸을 때 추억 그 기분으로 돌아와 봤으나 어디에도 고향에 온 기분은 없고 마치 해외여행을 간 듯 낯선 느낌이 드는 게 참 어색했다. 입으로는 영어를 혼자 생각할 땐 한국어로 하는 나 자신이 참 어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덧 사회생활을 하고 각자의 길로 간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 그동안의 삶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어 봤다. 다들 학교도 졸업하고 취직도 하고 나름 열심히 살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얘기를 하며 깨달은 건 난 아직도 이들을 내 친한 친구들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들의 말투와 행동에서 난 어릴 적 잠깐 알았던 미국에 간 친구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는 거다. 사실 이해는 간다. 난 그 시간에 그들의 곁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생각해본다. 나도 이 친구들과 함께 한국에 쭉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그 친구들의 결혼식에도 가고 축의금도 내고 했겠지. 며칠 있으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걸 까맣게 잊고 잠시 타고 있는 지하철에서 봤던 내 또래의 사람들이 삶이 궁금했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고 있는 걸까.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참 궁금하다. 한국식 스타일로 한껏 멋을 낸 직장인을 보며 나도 한국에 살았더라면 저랬을까 생각에 잠겨본다.

 

미국은 나라가 크다 보니 정을 붙이고 사귀다 보면 다들 어디론가 떠나고 만다. 다른 주로 가버리면 볼 일이 거의 없다. 학교 다닐 때 잠깐 알았던 유학생 친구들 그리고 교환학생 친구들도 다 제 길을 찾아 떠났다. 가끔씩 미국에 놀러 오면 꼭 나를 보러 오던 친구들도 한동안 소식이 뜸하다. 그들이 돌아가면 소셜미디어로 한동안 주거니 받거니 얘기하지만 어느덧 답장은 오지 않고 몇 년 뒤 결혼사진이 올라온다. SNS를 보면 그들은 이미 고국에 돌아가 저마다 모임이 있고 삶이 있다. 다시 정말로 혼자 남고 나는 잊혀지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아니 내가 잊어버린 걸 수도 있다. 살다 보니 삶에 치어서 또 깊게 사귀고 알던 친구들도 다 떠나버린 탓에 곧 사람에 대한 기대도 하지 않게 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한인마트나 교회에서 마주쳤던 사람들에게 물어봤었다.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어요?' '20년이요.' '30년이요.' 그 말을 하는 그들의 표정에 어딘지 모르게 어두움이 있었는데 그때는 단순히 오래돼서 영어를 잘하겠다고 생각했을 뿐 그 깊이를 알지 못했다. 어느 순간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게 느낌일 뿐 아니라 사실임을 깨달을 때 나도 그들처럼 진정 이민자가 되었음을 다시 한번 자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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